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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종합

제라드와 손아섭, 약팀 에이스의 굴레

by 마드리드의 거인 2023. 4. 30.

국적도 다르고 종목도 다르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리버풀 FC와 한국 KBO의 롯데 자이언츠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두 팀 모두 항구도시를 연고로 하고 있으며, 매우 열정적인 팬들을 보유하고 있고, 오랜 기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는 암흑기를 겪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유사하다. 다만 리버풀은 2019/20시즌 마침내 리그 우승을 하며 무관의 굴레를 끊어냈지만, 롯데 자이언츠는 작년까지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올해 4월 30일 기준 리그 1위).

리버풀과 롯데 모두 암흑기를 버티게 해준 에이스들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의 별명은 모두 심장인데, 리버풀의 심장이라고 불린 스티븐 제라드와 자이언츠의 심장이라고 불린 손아섭이 그 주인공이다.

 

제라드는 미드필더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던 다재다능한 선수로 최고의 장점은 특유의 우수한 킥력이었다. 이 킥력을 바탕으로 많은 장거리 패스를 성공시켰음은 물론이고, 최고 수준의 중거리슛터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손아섭 역시도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줬던 선수로 높은 타율과 함께 적지 않은 수의 홈런과 도루를 매년 기록했다. 손아섭의 최대 장점은 뛰어난 컨택 능력이며 이 컨택 능력을 활용해 최다 안타 타이틀을 3회나 따내기도 했다.

두 선수 모두 정말 훌륭한 선수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매우 큰 흑역사가 있다. 제라드의 흑역사는 2014년 4월 27일에 나왔다. 2013/14시즌 프리미어리그 36라운드 첼시와의 경기 전반 종료 직전, 제라드는 마마두 사코의 패스를 받다가 넘어지면서 공을 흘렸고, 결국 이 실수가 뎀바 바의 선제결승골로 연결되면서 리버풀이 패하고 말았다. 이 날의 패배로 리버풀은 선두 자리를 맨시티에게 내주게 되면서 리그 우승에 실패하게 됐다.

손아섭의 흑역사는 2011년 10월 16일에 나왔다. SK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6:6동점으로 맞선 9회 말 1사 만루에서 손아섭은 정우람의 초구를 공략했으나 2루수 앞 병살타로 물러났고, 결국 롯데는 그 경기를 6:7로 패했다. 이후에도 롯데는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갔으나 결국 2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이 실패했다.

 

그리고 이 흑역사들은 이후에도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제라드의 그 실수는 지금까지도 조롱의 요소로 쓰이며, 그에게는 항상 ‘리그 우승도 없는 미드필더’라는 비난과 저평가가 뒤따른다. 손아섭 역시도 그 한 장면 때문에 커리어 내내 ‘찬스에 약한 선수’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제라드는 ‘그 실수’를 했던 시즌 이미 만 33세로 전성기가 지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하지 않던 레지스타로 변신하여 리그 정상급 활약을 펼쳤고, 13골과 14 도움을 기록하며 리그 도움왕과 공격 포인트 4위에 올랐다. 레지스타가 공격 포인트를 쌓지 쉽기 않은 역할임을 감안하면 이 해 제라드의 활약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이 시즌 리버풀에 제라드가 없었으면 리버풀은 2위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해당 시즌 리버풀의 리그 우승이 불가능했던 것은 불안한 수비진 때문이었지만, 사람들은 정말 좋은 활약을 펴다가 딱 한 번의 실수만을 저지른 제라드에게 너무나도 많은 비난을 쏟아냈다.

 

손아섭은 2011년 0.322의 타율과 함께 1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4.9의 WAR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2위 롯데와 3위 SK의 경기차는 2경기차였으니 손아섭이 없었다면 롯데는 플레이오프 직행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손아섭은 그날, ‘그 타석’ 전까지 4타수 3안타를 기록 중이었는데, 만약 손아섭이 그 날 1안타에 그쳤다면, 애초에 그 만루 상황은 손아섭에게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손아섭은 통산으로 봤을 때 WPA, 득점권 성적, 이닝별 성적, CL&Late 성적, 월별 성적 등 그 어떤 스플릿 성적을 봐도 매우 준수하다. 오히려 클러치 히터라고 불려야 맞지만, 손아섭은 그 한 타석 때문에 커리어 내내 ‘찬스에 약하다’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전성기를 보낸 팀에서 은퇴를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도 두 선수는 매우 유사하다. 스티븐 제라드는 고별전에서 득점에 성공했지만 팀은 1-6으로 패했고, 결국 리그 6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원클럽맨과 현역 연장의 갈림길에서 제라드는 현역 연장을 선택했고, LA 갤럭시에서 2 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다. 보드진이 제라드와의 재계약에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콥들 역시도 제라드를 원망하지 않았다.

 

손아섭 역시 마지막 시즌을 8위로 마쳤고, 팀은 FA가 된 그를 적극적으로 붙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경남 지역 라이벌 팀인 NC다이노스가 손아섭을 영입했고, 롯데가 제안한 금액과 NC가 제안한 금액의 차이를 본 롯데 팬들은 그를 원망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이들은 커리어를 순수 무관으로 마치지는 않았다. 제라드는 단지 리그 우승만 하지 못했을 뿐, 2001년부터 트로피를 수집하며 11차례의 우승을 경험했다. 특히 구단 역사상 최고의 순간 중 하나인 ‘이스탄불의 기적’ 당시 맹활약하면서, 리버풀 팬들에게 영원한 캡틴으로 남게 됐다.

손아섭은 국가대표팀에 단골로 뽑히면서 아시안게임 우승 2차례, 그리고 1차례의 프리미어12 우승을 경험했다. 특히 프리미어12 4강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9회 대타로 나서 결정적인 안타를 때려내며 한국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극에 일조했다.

 

종목을 막론하고 스포츠에서 약팀의 에이스는 고독한 자리다. 자신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팀의 성적에 1차로 스트레스를 받고, 팀 성적에 대한 책임을 묻는 비난의 목소리에 2차로 스트레스를 또 받게 된다.

 

팬들은 더 많은 승리, 더 많은 우승을 포기하고 팀에 남아있는 선수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모른다. 그 선수가 없다면 팀은 더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혹은 인정하기 싫어서 그 선수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묻곤 한다.

 

이 글에서는 제라드와 손아섭을 예로 들었지만, 이 둘 외에도 많은 에이스들이 좋지 못한 팀 성적에 억울하게 비난을 당하고는 한다. 전력이 약한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모든 선수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마친다.